죽음을 편하게 받아들이는 방법

어느날 지인이 자신은 지금 죽음에 대해서 막연하게 공포감이 들어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고 하소연해왔다. 우리는 죽음을 왜 두려워할까. 죽음 이후의 불확실성에 대해서 두려운 것은 아닐까. 아직 공식적으로는 죽음 이후에 다시 돌아와서 “죽어보니 이렇더군요.”라고 말한 사람이 없었으니, 그 죽음 이후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 아닐까.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거의 확실시 되는 것이, 태어난 이래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들, 가족들과의 추억, 이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인데, 이것 자체가 어떤 것인지 나도 상상이 되지 않는다. 현대 의학이 설명하기로는 기억이라는 것은 뇌속의 신경조직에 저장되는 것이므로, 만약 죽어서 이 뇌의 기능이 정지되고, 형체가 소멸되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사고나 기억이 불가능할 것이다.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상황 자체가 상상이 안된다. 루이 14세가 ‘두려운 것은 죽음보다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라고 말한 것이 공감이 된다.

차츰 나는 의사로서 실제로 사망 선언을 내려보기도 하고 환자들의 보호자들을 위로하기도 하면서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수십년의 시간을 함께한 사람을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는 남아있는 자들의 반응도 각양각색이었지만, 내가 가장 유심히 관찰한 것은, 세상을 떠나는 바로 그 당사자였다. 사망 직후의 풀린 동공을 보면서, 지금 저 사람의 의식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피아를 구분하는 내가 나라는 이 생각. 한국어로 생각을 하고 있는 이 두뇌. 이것이 사라진다니 생소하다. 상상이 안된다. 그래서 더욱 공포감이 엄습해온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장자가 ‘죽음만이 확실하다’고 말한 것 처럼 누구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혹자는 ‘죽음은 삶의 최고의 발명’이라며 차라리 죽음이 없는 상황이 더 끔찍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어찌되었건 큰 변화는 항상 두려움을 동반한다. 그 변화의 저편 넘어에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는지 그 누구도 믿을 수 있는 정보를 준 적이 없기에 더욱 곤혹스럽다.

매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해 올 때마다, 글 제목처럼 죽음을 조금 더 편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 본적이 없는가. 다행히 방법이 있다. 사고의 전환으로 어느정도 죽음의 공포를 경감시킬 수 있다. 죽음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피할 수 없다는 것도 변함 없지만, 그래도 생각을 약간만 달리하면 조금 더 마음 편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가지의 공통점이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에서 나타난다. 인류가 세상에 문명을 싹틔운 이래, 그들이 남긴 문학, 과학, 종교 등에서 아주 오랫동안 죽음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왔다.

죽음 = 영혼이 나를 떠나는 것.

가만히 생각해 보자. 이 생각을 바꿀 수는 없을까. 사람들이 죽음을 이렇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아마도 남아있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죽은자의 모습이므로, 그전과는 다른 모습을 설명할 길이 ‘영혼이 떠났다.’라는 것 외에는 달리 없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죽음 = 몸이 나를 떠나는 것.

지금은 아까와는 뭔가 조금 다른 느낌이 들지 않는가. 이제 죽음을 조금 더 편안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지 않은가. 다른 형태의 ‘상실’ 혹은 ‘종결’의 상황에서도 충격을 줄이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서 이다. 사실 이 글은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본인은 알겠지.)가 큰 상실에 빠져서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쓴 글이다. 그래서 원래 이메일로 전하고자 했던 글이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비슷한 고민에 있는 사람이 더 있을 것 같아 다른사람도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생각에 글을 공개하게 되었다. 아무튼,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종종 죽음 이후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나와 같은 평범한 종류의 사람이라면, 약간의 사고전환을 통하여 남아있는 삶을 조금 더 편하게 보내는 방법을 찾았기를 기대한다.